<이런 사랑 Un Garcon D'ita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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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희한하게도 지금 내가 가장 못 견디게 그리운 것은 바로 이 순간들이다. 아무것도 아닌 이 순간들, 그러나 우리 삶의 전부가 담겨 있는 순간들.
그것은 내 목에 달려들기 위해서나 걸음을 서두를 때 휘날리는 안나의 원피스 자락이기도 하고, 웨이터가 가져다 놓은 화이트 마티니 잔을 입으로 가져갈 때 안나의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팔찌이기도 하며, 선글라스를 들어올려 머리카락을 고정시키는 안나의 동작이기도 하다.
그것은 난투 끝에 지어 보이는 레오의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기도 하고, 베스파를 버팀목에 세워두기 위해 핸들을 잡아당길 때 혈관이 불거지는 레오의 팔뚝이기도 하며, 시선을 끌려 할 때 건조하게 움직이는 레오의 엉덩이이기도 하다.
이제 그 순간들에 내가 없다는 것이, 내가 죽었다는 가장 명백한 표시다.

그 모든 순간을 알고 있는데 이제 그 순간들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다니, 그럴 수 있을까? 단지 예전에 행복했었다는 이유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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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고 의혹을 억누를 수 없다.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그러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갖가지 다양하고 괴상망측한 의문들이 줄기차게 성채의 벽을 찍어대는 날카로운 무리처럼 나를 공격한다.
사실 의문은 무엇이든 간에 늘 곤혹스러운 것이다. 해답만이, 그것도 아주 명쾌한 해답만이 평온을 보장한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이다. 알게 될 사실로 인해 무참해진다해도 상관없다. 어떤 사실을 알게 되든, 모호함과 암흑상태보다는 나을 것이다.
심지어 믿을 수만 있다면 거짓말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끔찍한 진실과 완벽한 소설 중에서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둘 다 괜찮기 때문이다. 둘 중 어떤 것도 나를 불확실의 고통에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언제나 그 둘 사이에 있는 회색지대다. 왜 모든 것이 검정색 또는 흰색이 아닌걸까? 왜 죄인과 무고한 자, 영웅과 악한 둘 중 하나가 아닌 걸까? 왜 뉘앙스와 단계에 따른 미묘한 차이를 강요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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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얼마 후 호텔 방에 돌아왔을 때 나는 어리석게도 루카가 방에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호텔에 돌아왔을 때 루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잠자코 둘이서 키스를 나누었던 것이 가끔 생각난다. 우리는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우리의 감정이 처음 순간부터 이론의 여지 없이 확고하고 영원히 자리 잡은 진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느렸던 것이 기억난다. 그렇다. 느린 동작들과 마음을 푹 놓고 자신을 놓아버렸던 포기의 순간들이 기억난다. 
지금 나는 솔레피노 호텔의 깜빡거리는 네온인을 바라보고 있다. 밤이 얼음장같이 차다. 이 가을은 겨울을 닮았다. 침대 시트도 차갑다.
강물이 으르렁대면서 하구로 시체들을 쓸어간다. 그러면서 좋았던 시절도 함께 데려간다. 때로는 좋았던 세월을 데려오기도 할까?
늘 그렇듯 잠은 늦게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루카의 얼굴과 함께 잠들 것이고 내일도 루카의 얼굴과 함께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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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필리피노 리피가 그린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린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감동적인 자화상 속의 얼굴을. 나는 가끔 이 청년의 소녀 같은 얼굴을 감상하러 갔었다. 도톰한 입술과 수줍음인지 경멸인지 모를 감정이 담긴 시선, 가시덤불 같은 머리카락과 다부진 코는 거의 외울 지경이 되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오직 나를 보기 위해서인 것만 같았다. 레오는 이 얼굴을 닮았다.


























필립 베송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