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Satu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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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시간 동안 그는 시간의 흐름이 녹아 없어지고 그의 삶 나머지 부분을 통째로 망각하는 꿈같은 몰입을 경험했다. 그는 순수한 현재 안에, 과거의 무게로부터도 미래에 대한 어떠한 불안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경계 안에 기거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으나, 심오한 행복이었다. 자기 아닌 매개 속에서 자신을 느낀다는 점에서 약간은 섹스와도 비슷하지만, 쾌감이 덜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능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그가 다른 수동적인 형태의 오락을 통해서는 절대로 얻지 못할 성취감을 선사한다. 책과 영화, 아니 음악조차도 이런 만족감은 주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일한다는 것도 한몫하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이 자비로운 초탈의 경지를 얻기 위해서는 곤경, 장시간에 걸쳐 요구되는 고도의 집중력과 고난도의 기술, 긴장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어야 하며, 심지어는 위험 요소까지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지금 그는 평온하고, 거칠 것 없으며, 충분히 살아 있을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이것은 투명한 공허감,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소리 죽인 환희다. 다시 일을 시작했고, 아내와 사랑을 나눈 아침 이른 시각도 있고, 테오의 노래에 빠졌던 오후도 있지만, 그는 하루 쉬는 오늘, 이 소중한 토요일의 그 어느 순간보다 바로 지금 행복하다. 자기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고, 자리에서 일어나 수술실을 나서면서 그는 결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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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터에게는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머잖아 악몽 같은 환각에 시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헨리는 동료 가운에 이 분야의 전문가 한두 명에게 부탁하여 재판일자가 다가올 무렵이면 박스터가 두 발로 제대로 서지도 못할 것이라고 검찰에 피력해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 다음에는, 박스터가 더 이상의 해악을 끼치기 전에 이 사회가, 적절한 병원이, 그를 안전하게 불러들일 것이다. 헨리는 이러한 조치, 이 환자를 어떻게든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이것이 용서일까? 아니겠지. 아니,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그가 용서를 하고 말고 할 입장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면 그가 용서를 구하는 것인가? 책임은 결국 그에게 있지 않은가. 스무 시간 전에 그가 공식적으로 봉쇄된 도로를 횡단했으며, 이 행위가 연쇄적으로 사건을 빚은 것은 아니다. 아니면, 나약함인가? 사람이란 일정한 나이를 지나 최초의 경각심을 느끼고 나면, 남은 세월의 유한함에 압도되어, 죽어가는 사람을 아무래도 더 가까이서 지켜보게 되며 더 짠한 형제애를 품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현실적인 판단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지옥행이 머지 않은 사람을 채찍질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수술실에서 그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헨리 역시 박스터의 고문에 일조했다. 복수는 충분했다. 그리고 여기 헨리가 권위를 행사하며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하나의 영역이 있다. 그는 이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를 안다. 선의의 치유와 악의적 치유의 차이는 무한에 가까운 것이다.




이언 매큐언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