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Die Welt Ist Nicht Immer Freit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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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오전 11시. 소파에 앉아 할 일을 적은 목록을 멍하니 바라본다. 오늘 안에 이 일들을 모두 해치우려고 일부러 8시에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쌓인 일을 바로 시작하는 대신 쪽지만 뚫어지게 보고 있다. 쪽지에는 신이 나서 할 만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일들을 하지 않으려고, 차라리 다른 일거리를 생각해 내려고 벌써 세 시간째 이러고 있다. 이러면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는 좀 명분이 선다. 어쨌든 나는 지금 뭔가 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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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온, 유감스럽게도 매우 일방적이었던 내 첫사랑. 나는 그녀가 잠잘 때 듣는 어학 학습 테이프를 몰래 훔쳐 영어와 불어의 단원 사이사이에 암시적인 메시지를 녹음했다. '다른 남자애들은 다 소시지다. 나는 이제 호어스트를 선택한다.' 그 후 어느 날 마리온은 내가 자기 꿈에 나타나 소시지를 끼운 빵을 먹는다고 털어놓았다. 오늘날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강한 북독 억양이 있기는 하지만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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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새벽 2시 이후면 할인율이 꽤 높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래서 나는 서독에 사는 친구들에게 주로 새벽 2시 이후에 전화를 걸었고 그 결과 그곳에 사는 친구가 상당히 줄었다. 그런데다 새벽에 주로 전화를 하다 보니 낮에는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얼마 못가 집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학업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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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요. 종점이오. 집에 다 왔소."
"집이라고요? 어디?"
"종점이라고요. 테겔 오르트."
테겔 오르트면 시의 북쪽 경계다. 테겔 오르트면 내 집이 있는 동네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테겔 오르트는 집과 정반대쪽이다. 테겔 오르트는 그러니까 세계의 엉덩이, 머나먼 끝이다. 게다가 그 엉덩이는 마침 설사 중이었다. 밖에는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빗속에 우뚝 섰다. 50미터 앞에 지붕이 있는 간이대기소가 보였지만 꼼짝 않고 서서 몸이 흠뻑 젖게 내버려두었다. 행여 이런 방법으로라도 심야버스에서 잠들어버리는 버릇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그런 사람이다. 자신에게도 엄격하고 공명정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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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는 '줄긋기' 실험에 착수했다. 새 연필심히 완전히 닮아 없어질 때까지 종이에 정확히 몇 개의 선을 그을 수 있는지 밝혀내는 게 이 실험의 목표다. 친구들도 지대한 관심을 보일 게 분명하다. 이 실험은 우리에게 적어도 1주일분의 대화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마 학술계의 총아 대접을 받을 것이다. 17,239개째 선을 막 내리긋는데 느닷없이 내 안의 소리가 석연치 않은 혐의를 추궁하는 교신을 보내온다. "어이, 호어스트, 자네, 왠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참! 그런가? 하지만 그럼 안 되나? 어차피 내 시간인데."



호어스트 에버스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