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상처받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다지 상처받지 않게 된 것은 나라는 인간이 뻔뻔스러워진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나이 먹어서 젊은 애들처럼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고 인식했고, 나는 그 이후 되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훈련을 쌓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인식에 도달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절실히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은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고유한 권리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물론 나이를 먹어도 마음에 상처받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노골적으로 겉으로 드러내거나, 아니면 언제까지나 질질 끌고 가는 것은 웬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설사 상처받더라도 화가 치밀더라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오이같이 상쾌한 얼굴을 보이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지만, 훈련을 거듭하는 사이 점차로 정말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닭과 달걀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상처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훈련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을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상처받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면 제일 좋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보지 못한 체, 듣지 못한 체하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군요.







하루에 180도 바뀌어버리는 일도 있다

이것은 전에도 어딘가에 쓴 적이 있는데, 내가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어느 하루’가 있다. 스물아홉의 4월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그때의 일을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햇살과 바람의 상태와 주위에서 들리던 소리 같은 것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돌연 무엇인가가 반짝 하고 아주 작고 눈부시게 빛났고, 그래서 나는 ‘그래, 이제부터 소설을 쓰자.’ 하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인식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계기라든가 근거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오만함이 있었다.
그로부터 대략 1년 후, 내가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이 문예지의 신인상을 수상해서, 나는 그럭저럭 작가로 불리게 되었지만, 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 나는 바로 그날에 진구구장의 외야석에서 이미 작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What a difference a day makes.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느낌은 실로 열렬한 사랑에 빠진 것과 원리적으로 똑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등줄기가 찌르르한 느낌은 열렬한 운명적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너무나도 좋은 느낌이었다.







여행의 동반자, 인생의 길동무

여행길에는 갖고 가지 않지만 일생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 책이 있다. 내게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그렇다. 그렇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고, 무심히 읽고 싶은 페이지를 펼쳐서 몇 페이지를 주의 깊게 읽는다. 줄거리는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읽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게다가 처음부터 읽으면 놓칠 것 같은 부분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신기하게 눈에 들어오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뛰어난 문체를 지닌 밀도 높은 작품이 아니면 안 된다. 또한 거기에는 개인적인 몰입이 없어서도 안 된다.
......언제까지고 자신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는 책을 한 권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렇게 소중한 인생의 길동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에는 큰 차이가 생기게 될 것이다.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