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집 村上春樹 雜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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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젊은 독자에게 긴 편지를 받는다. 그들 대부분은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 차도 크고, 지금껏 축적한 경험도 전혀 다를 텐데"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러니 당연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혹여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당신 안에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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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번역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어학 실력이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특히 픽션의 경우, 나름의 편파적인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것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내가 내 작품이 번역될 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편파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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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본적으로 고전이 될 만큼 뛰어난 명작은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인 대응의 한 형태에 불과하므로 다양한 다른 형태의 접근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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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 세대에게는 노자키 씨가 번역한 <호밀밭에서 잡아줘>가 이미 하나의 ‘정석’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말하자면 ‘뇌리에 깊이 각인된 최초의 기억’으로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 기억의 깊이는 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그런 세대에게(실은 나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 나의 새 번역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성지 침범’처럼 느껴진 듯하다. 그런 데서 비롯된 심리적 반발과도 같은 반응은 솔직히 말해 적지 않았다. 그러한 현상은 물론 노자키 씨의 번역이 훌륭하기 때문이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것은ㅡ하나의 번역과 오리지널 텍스트가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까지 일체화한다는 것은ㅡ조금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나도(한 사람의 번역가로서 또한 내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는 소설가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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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은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개인적인 거울로 기능해온 듯 느껴진다. 그때 그 사람이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빛의 양이나 내리쬐는 각도에 따라, 필시 다양한 다른 모습들로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그런 다면적인 검증을 견뎌낸 소설은 내 독서 경험에서 보더라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출간되지 반세기도 더 된 이 작품을, 조금 별난 열여섯 살 소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지금도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집어들어 열심히 그리고 절실하게 읽는 것이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읽어나갈 것이다. 그런 확신이 새삼스레 다시 들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작품을 분예비평적인 각도에서 상세하게 따져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감정적 호불호로 정리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대신해 <호밀밭의 파수꾼>의 역할을 맡아줄 소설은 달리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강조해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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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어느 한 구절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가 있다. 열여덟 살 때 트루먼 카포티의 <최후의 문을 닫아라>라는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마지막 한 구절이 머릿속 깊이 박혀버렸다. 이런 문장이다.
”그리고 그는 베게에 머리를 깊이 파묻고 두 손으로 귀를 감싸 쥐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 라고.”
“think of nothing think, think of wind”라는 마지막 문장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일본어로 그 여운을 정확히 번역하기는 매우 어렵다. 트루먼 카포티의 미문 대부분이 그렇듯,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여운 속에서만 살아나는 마음 본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뭔가 고통스럽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그 구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라고. 그래서 눈을 감고 마음의 문을 닫고 바람만 생각했다. 다양한 장소에서 부는 바람, 다양한 온도, 다양한 냄새가 깃든 바람. 그것은 분명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바람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바람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네 인생 중에 아주 짧은 한 시기뿐일 것이다. 왠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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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버의 작품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점은 소설의 시점이 절대 '땅바닥' 높이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없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생각하든 일단은 맨 밑바닥까지 가서 지면의 확고함을 두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로부터 조금씩 시선을 위로 올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잘난 척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달변을 싫어하고, 요령을 싫어하고, 지름길을 싫어했다. 있는 것으로 충분히 때우기를 철저히 꺼렸다. 따라서 그가 쓰는 픽션은 대부분 '모조품'이 아니었고, 진정한 박진감을, 따뜻하고 깊은 마음과 폭넓게 확장되는 독자적인 풍경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편의적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고도의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다. 실제로 손에 들고 만질 수 있는 영혼의 감촉이 있다. 나는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고 일본어로 옮기면서 다른 데서 찾아보기 힘든 따스함과 감촉을 늘 생생하게 실감해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는 순수한 재미와 깜짝 놀랄 만한 초현실적인 기묘함이 넘쳐난다. 거기에는 늘 놀라움이 있다. 이야기가 앞으로 어디를 향해 어떻게 전개될지 대개의 경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읽어보면 잘 아시겠지만, 카버는 이른바 '솜씨 좋은 소설'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였다. 레이먼드 카버만이 풀어낼 수 있는 어법으로 픽션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 레이먼드 카버가 레이먼드 카버로 존재하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죄 많은 일이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고달픈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는 레이먼드 카버라는 화자를 얻음으로써 그러한 '고달픔'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을 픽션으로 상대화해 한 단계 위의 세계로 스스로 끌어올린 것이다. 정리하자면 스스로를 조금은 구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먼드 카버는 살아 있는 내내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줄기차게 써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조금이나마 구제함으로써 우리 역시(대부분의 경우) 아주 조금은 구제받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전 세계 독자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카버의 작품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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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든 소설이든 가장 기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리듬이다. 자연스럽고 기분 좋으면서도 확실한 리듬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계속 읽겠지. 나는 리듬의 소중함을 음악에서(주로 재즈에서) 배웠다. 그리고 그 리듬에 맞는 멜로디, 요컨대 적확한 어휘의 배열이 뒤따른다. 그것이 매끄럽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게 없다. 그리고 하모니, 그 어휘들을 지탱해주는 내적인 마음의 울림. 그 다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뒤따른다ㅡ즉흥연주다. 특별한 채널을 통과한 이야기가 내부에서 자유로이 솟구쳐 오른다. 나는 그저 그 흐름을 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이 온다. 작품을 다 마치고(혹은 연주를 다 마치고) 맛볼 수 있는 '내가 어딘가 새로운, 의미 있는 장소에 이르렀다'고 고양된 기분이다. 그리고 잘만 풀리면, 우리는 독자=청중과 그 고조되어가는 기분을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멋진 성취다.
......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note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 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