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gten, The Hunt





<잠 ねむ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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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파에 앉아 《안나 카레니나》를 계속 읽기 시작했다. 다시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등장인물도 장면도 대부분 잊어버렸다.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참 신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처음 읽었을 때 나름대로 감동도 했을 텐데 결국 아무것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당시에 품었을 감정의 떨림이나 흥분의 기억은 어느새 나를 떠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그 시절에 내가 책을 읽기 위해 소비했던 그 엄청난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 읽기를 멈추고 한참 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문듣 깨닫고 보니 나는 멍하니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잎사귀가 촘촘하게 무성해진 커다란 느티나무를. 나는 머리를 저으며 다시 그다음을 읽기 시작했다.
상권의 중간쯤을 넘어선 책장에 초콜릿 부스러기가 끼여 있었다. 초콜릿은 바싹 말라 부슬부슬해진 채 책장에 달라붙어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내가 분명 초콜릿을 먹으며 이 소설을 읽은 것이다. 고등학생이던 내가 분명 초콜릿을 먹으며 이 소설을 읽은 것이다. 나는 뭔가를 먹으면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한 뒤로 초콜릿도 먹지 않게 되었다. 단 과자를 먹는 것을 남편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도 거의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집 안에 과자류는 일절 놓아두지 않았다.
하얗게 변색한 오랜 옛날의 초콜릿 조각을 바라보는 사이에 나는 간절히 초콜릿이 먹고 싶어졌다. 옛날과 똑같이 초콜릿을 먹으면서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싶었다. 온몸의 세포가 초콜릿을 원하며 숨을 죽이고 바짝 오그라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










The Oscars 2013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象工場のハッピーエンド>





























커피를 마시는 어떤 방법에 대하여

그날 오후에는 윈턴 켈리의 피아노곡이 흘렀다. 웨이트리스가 하얀 커피 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 두툼하고 묵직한 잔이 테이블에 놓일 때 톡 하고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마치 수영장 밑바닥에 떨어진 자그마한 돌멩이가 내는 소리처럼 그 여운은 내 귀에 오래도록 남았다. 나는 열여섯 살이었고, 밖에는 비가 내렸다.
그곳은 항구를 끼고 있는 아담한 소도시였고,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늘 바다 냄새가 풍겼다. 하루에 몇 번인가 유람선이 항구를 돌았고 나는 수도 없이 그 배를 타고 대형 여객선과 부두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리는 비에 흠뻑 젖어가며 갑판 위에 서 있었다. 항구 근처에 카운터 자리 외에는 테이블이 딱 하나뿐인 조촐한 커피집이 있고, 그 곳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왔다. 눈을 감으면 깜깜한 방에 갇힌 어린아이 같은 기분이 찾아왔다. 거기엔 언제나 커피 잔의 친숙한 온기가 있었고, 소녀들의 보드라운 향내가 있었다.
정말로 내 마음에 든 것은 커피의 맛 보다는 커피가 있는 풍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 앞에는 저 사춘기 특유의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이 있고, 거기에는 커피를 마시는 내 모습이 또렷하게 비쳤다. 그리고 등뒤에는 네모난 틀 속 조그만 풍경이 있었다.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의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이 나를 축복했다.
그것은 아담한 소도시에서 한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은밀한 기념사진이기도 하다. 자, 잔을 가볍게 오른손에 쥐고, 턱을 당기고, 자연스럽게 웃어요...... 좋았어, 찰칵.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 주는 따스함의 문제, 라고 리처드 브로티건은 어느 작품에 썼다.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나는 이 문장이 제일 마음에 든다.







포도
점보제트기의 추락에 비교하면 매우 작은 사고일지 모르겠으나, 몇 년 전 태풍 때문에 밤새도록 주오 선 열차 안에 갇힌 적이 있었다. 저녁나절 마쓰모토에서 특급열차를 타고 오쓰키를 막 지나쳤을 무렵인데, 선로변 벼랑이 무너져내린 바람에 열차가 완전히 멈추고 만 것이다.
날이 밝고 보니 태풍은 이미 물러갔지만 선로의 복구 작업에 별다른 진척이 없어 우리는 결국 그날 오후까지 열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란 인간은 어차피 워낙 한가하니 도쿄에 하루이틀 늦게 돌아간들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나는 열차가 멈춰 선 조그만 마을을 산책하다가 포도 한 봉지와 필립 K. 딕의 문고본을 세 권 사들고 자리로 돌아와, 포도를 먹으며 느긋하게 책을 읽었다. 스케줄이 빡빡한 승객 분께는 상당히 미안하지만 내게는 꽤나 즐거운 체험이었다. 장시간 책을 읽을 수 있지, 도시락도 받지, 특급 요금도 되돌려 받지. 그런데도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통 같으면 절대 내릴 리 없는 조그만 역에 내려서 거기 있는 조그만 마을을 아무런 목적 없이 어슬렁어슬렁 걷는 것도 아주 신나는 일이다. 이름은 잊었지만, 한 십오 분쯤 걸으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구경할 수 있을 만큼 조그만 동네였다. 우체국이 있고, 서점이 있고, 약국이 있고, 소방서 출장소가 있고, 운동장이 유난히 넓은 초등학교가 있고, 강아지가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태풍이 훑고 지나간 하늘은 한없이 푸르고, 여기저기 물이 고인 웅덩이에는 하얀 구름이 또렷이 비친다. 포도를 전문으로 파는 도매상 비슷한 가게 앞을 지나가려니 싱싱하고 새콤달콤한 포도 향내가 감돈다. 그 가게에서 나는 포도를 한 봉지 샀다. 그리고 필립 K. 딕을 읽으며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치웠다. 덕분에 내가 갖고 있는 <화성의 타임슬립>은 군데군데 포도즙으로 얼룩져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村上春樹 雜文集>





























20
이따금 젊은 독자에게 긴 편지를 받는다. 그들 대부분은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 차도 크고, 지금껏 축적한 경험도 전혀 다를 텐데"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러니 당연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혹여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당신 안에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259
훌륭한 번역에 가장 필요한 요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어학 실력이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특히 픽션의 경우, 나름의 편파적인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것만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내가 내 작품이 번역될 때 가장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입니다. 편파적인 사랑이야말로 내가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가장 편파적으로 사랑하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263
나는 기본적으로 고전이 될 만큼 뛰어난 명작은 몇 가지 다른 번역이 있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번역은 창작이 아니라 기술적인 대응의 한 형태에 불과하므로 다양한 다른 형태의 접근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유일무이한 완벽한 번역이란 원칙적으로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는 작품에 오히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까 싶다… 양질의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해 다양한 측면에서 집적하여 오리지널 텍스트의 본디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번역의 가장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264
중장년 세대에게는 노자키 씨가 번역한 <호밀밭에서 잡아줘>가 이미 하나의 ‘정석’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말하자면 ‘뇌리에 깊이 각인된 최초의 기억’으로 기능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그 기억의 깊이는 내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그런 세대에게(실은 나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 나의 새 번역은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성지 침범’처럼 느껴진 듯하다. 그런 데서 비롯된 심리적 반발과도 같은 반응은 솔직히 말해 적지 않았다. 그러한 현상은 물론 노자키 씨의 번역이 훌륭하기 때문이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이것은ㅡ하나의 번역과 오리지널 텍스트가 오랜 세월 동안 이렇게까지 일체화한다는 것은ㅡ조금은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나도(한 사람의 번역가로서 또한 내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는 소설가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268
요컨대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은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제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개인적인 거울로 기능해온 듯 느껴진다. 그때 그 사람이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빛의 양이나 내리쬐는 각도에 따라, 필시 다양한 다른 모습들로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그런 다면적인 검증을 견뎌낸 소설은 내 독서 경험에서 보더라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출간되지 반세기도 더 된 이 작품을, 조금 별난 열여섯 살 소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지금도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집어들어 열심히 그리고 절실하게 읽는 것이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많은 이들이 계속해서 읽어나갈 것이다. 그런 확신이 새삼스레 다시 들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작품을 분예비평적인 각도에서 상세하게 따져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감정적 호불호로 정리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호밀밭의 파수꾼>을 대신해 <호밀밭의 파수꾼>의 역할을 맡아줄 소설은 달리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강조해봐야 별 의미는 없겠지만,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소설이다.







396

책을 읽다보면, 어느 한 구절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가 있다. 열여덟 살 때 트루먼 카포티의 <최후의 문을 닫아라>라는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마지막 한 구절이 머릿속 깊이 박혀버렸다. 이런 문장이다.
”그리고 그는 베게에 머리를 깊이 파묻고 두 손으로 귀를 감싸 쥐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 라고.”
“think of nothing think, think of wind”라는 마지막 문장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일본어로 그 여운을 정확히 번역하기는 매우 어렵다. 트루먼 카포티의 미문 대부분이 그렇듯, 거기에는 어떤 종류의 여운 속에서만 살아나는 마음 본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뭔가 고통스럽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늘 그 구절을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을 생각하자’라고. 그래서 눈을 감고 마음의 문을 닫고 바람만 생각했다. 다양한 장소에서 부는 바람, 다양한 온도, 다양한 냄새가 깃든 바람. 그것은 분명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바람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인간이 진정으로 바람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네 인생 중에 아주 짧은 한 시기뿐일 것이다. 왠지 그런 것 같다.







322
카버의 작품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점은 소설의 시점이 절대 '땅바닥' 높이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없다. 무엇을 보든 무엇을 생각하든 일단은 맨 밑바닥까지 가서 지면의 확고함을 두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로부터 조금씩 시선을 위로 올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잘난 척하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달변을 싫어하고, 요령을 싫어하고, 지름길을 싫어했다. 있는 것으로 충분히 때우기를 철저히 꺼렸다. 따라서 그가 쓰는 픽션은 대부분 '모조품'이 아니었고, 진정한 박진감을, 따뜻하고 깊은 마음과 폭넓게 확장되는 독자적인 풍경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편의적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고도의 리얼리티를 갖추고 있다. 실제로 손에 들고 만질 수 있는 영혼의 감촉이 있다. 나는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고 일본어로 옮기면서 다른 데서 찾아보기 힘든 따스함과 감촉을 늘 생생하게 실감해왔다. 그러면서도 그의 작품에는 순수한 재미와 깜짝 놀랄 만한 초현실적인 기묘함이 넘쳐난다. 거기에는 늘 놀라움이 있다. 이야기가 앞으로 어디를 향해 어떻게 전개될지 대개의 경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읽어보면 잘 아시겠지만, 카버는 이른바 '솜씨 좋은 소설'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가 쓰고자 한 것은 단 하나의 레이먼드 카버 이야기였다. 레이먼드 카버만이 풀어낼 수 있는 어법으로 픽션에 담아 이야기하는 것. 레이먼드 카버가 레이먼드 카버로 존재하는 것이 때로는 고통스럽고 부끄럽고 죄 많은 일이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고달픈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는 레이먼드 카버라는 화자를 얻음으로써 그러한 '고달픔'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을 픽션으로 상대화해 한 단계 위의 세계로 스스로 끌어올린 것이다. 정리하자면 스스로를 조금은 구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이먼드 카버는 살아 있는 내내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줄기차게 써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스스로 조금이나마 구제함으로써 우리 역시(대부분의 경우) 아주 조금은 구제받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전 세계 독자들이 그토록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카버의 작품을 읽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405
음악이든 소설이든 가장 기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리듬이다. 자연스럽고 기분 좋으면서도 확실한 리듬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계속 읽겠지. 나는 리듬의 소중함을 음악에서(주로 재즈에서) 배웠다. 그리고 그 리듬에 맞는 멜로디, 요컨대 적확한 어휘의 배열이 뒤따른다. 그것이 매끄럽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게 없다. 그리고 하모니, 그 어휘들을 지탱해주는 내적인 마음의 울림. 그 다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뒤따른다ㅡ즉흥연주다. 특별한 채널을 통과한 이야기가 내부에서 자유로이 솟구쳐 오른다. 나는 그저 그 흐름을 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이 온다. 작품을 다 마치고(혹은 연주를 다 마치고) 맛볼 수 있는 '내가 어딘가 새로운, 의미 있는 장소에 이르렀다'고 고양된 기분이다. 그리고 잘만 풀리면, 우리는 독자=청중과 그 고조되어가는 기분을 공유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데서는 얻을 수 없는 멋진 성취다.
...... 텔로니어스 멍크는 내가 가장 경애하는 재즈 피아니스트인데, "당신의 연주는 어떻게 그렇게 특별하게 울리나요?"라는 질문에 그는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다. "새로운 음note은 어디에도 없어. 건반을 봐. 모든 음은 이미 그 안에 늘어서 있지. 그렇지만 어떤 음에다 자네가 확실하게 의미를 담으면, 그것이 다르게 울려퍼지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진정으로 의미를 담은 음들을 주워 담는 거야."
소설을 쓰면서 이 말을 자주 떠올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래, 그 어디에도 새로운 말은 없다. 지극히 예사로운 평범한 말에 새로운 의미나 특별한 울림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놓인다. 우리 앞에는 아직도 드넓은 미지의 지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는 비옥한 대지가 개척을 기다리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비밀의 숲>































상처받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내가 나이를 먹으면서 그다지 상처받지 않게 된 것은 나라는 인간이 뻔뻔스러워진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나이 먹어서 젊은 애들처럼 정신적으로 상처받고 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고 인식했고, 나는 그 이후 되도록 상처받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훈련을 쌓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인식에 도달했는가를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그때 절실히 생각했다. 정신적으로 상처받기 쉬운 것은 젊은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의 고유한 권리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물론 나이를 먹어도 마음에 상처받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것을 노골적으로 겉으로 드러내거나, 아니면 언제까지나 질질 끌고 가는 것은 웬만큼 나이를 먹은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설사 상처받더라도 화가 치밀더라도,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오이같이 상쾌한 얼굴을 보이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지만, 훈련을 거듭하는 사이 점차로 정말 상처받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닭과 달걀 중 어느 것이 먼저냐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상처받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훈련을 하는 것이 가능해졌을지도 모른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상처받지 않게 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면 제일 좋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보지 못한 체, 듣지 못한 체하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군요.







하루에 180도 바뀌어버리는 일도 있다

이것은 전에도 어딘가에 쓴 적이 있는데, 내가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어느 하루’가 있다. 스물아홉의 4월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그때의 일을 아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햇살과 바람의 상태와 주위에서 들리던 소리 같은 것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해낼 수 있다. 그때 내 머릿속에서 돌연 무엇인가가 반짝 하고 아주 작고 눈부시게 빛났고, 그래서 나는 ‘그래, 이제부터 소설을 쓰자.’ 하고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인식했다. 거기에는 구체적인 계기라든가 근거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오만함이 있었다.
그로부터 대략 1년 후, 내가 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이 문예지의 신인상을 수상해서, 나는 그럭저럭 작가로 불리게 되었지만, 나 자신의 의식 속에서 나는 바로 그날에 진구구장의 외야석에서 이미 작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What a difference a day makes.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 느낌은 실로 열렬한 사랑에 빠진 것과 원리적으로 똑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 등줄기가 찌르르한 느낌은 열렬한 운명적 사랑 외에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너무나도 좋은 느낌이었다.







여행의 동반자, 인생의 길동무

여행길에는 갖고 가지 않지만 일생 동안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 책이 있다. 내게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그렇다. 그렇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고, 무심히 읽고 싶은 페이지를 펼쳐서 몇 페이지를 주의 깊게 읽는다. 줄거리는 이미 머릿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읽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게다가 처음부터 읽으면 놓칠 것 같은 부분도 이런 식으로 읽으면 신기하게 눈에 들어오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뛰어난 문체를 지닌 밀도 높은 작품이 아니면 안 된다. 또한 거기에는 개인적인 몰입이 없어서도 안 된다.
......언제까지고 자신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는 책을 한 권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렇게 소중한 인생의 길동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에는 큰 차이가 생기게 될 것이다. 물론 오랜 세월을 두고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라디오 村上 ラヂオ>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특정한 상황이 되면 반드시 머리에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이를테면 하늘이 깨끗한 밤에 별을 올려다보며,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Like Someone in Love)"이라는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린다. 재즈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스탠더드 곡이다. 아시는지.

요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혼자 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기타 소리에 넋을 잃고 있기도 해,
마치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하고 있으면 그런 일이 있다. 의식은 어딘지 기분 좋은 영역을 살랑살랑 나비처럼 떠돌고, 지금 무엇을 하는지도 잊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긴 시간이 흐른 뒤이다.
생각건데, 사랑을 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는 열여섯에서 스물하나까지가 아닐까.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으니 간단히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 아래라면 뭔가 유치해서 우스울 것 같고, 반대로 이십대가 되면 현실적인 것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보다 많은 나이가 되면 쓸데없는 잔꾀가 늘게 되고 말이다.

그러나 십대 후반 소년소녀의 연애에는 적당하게 바람이 빠진 듯한 느낌이 있다. 그들은 깊은 사정을 아직 모르니 현실에서는 투닥거리는 일도 있겠지만, 그만큼 모든 것들이 신선하고 감동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런 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영원히 잃어버린 뒤라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러나 기억만큼은 신선하게 머물러 그것이 우리의 남은 (아프디 아픈 일이 많은) 인생을 꽤 유효하게 따뜻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줄곧 소설을 써 오고 있지만 글을 쓸 때도 그런 ‘감정의 기억’이란 몹시 소중하다. 설령 나이를 먹어도 그런 풋풋한 시원(始原)의 풍경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몸속의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다지 춥지 않게 늙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이유로 귀중한 연료를 모아 두기 위해서라도 젊을 때 열심히 연애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돈도 소중하고 일도 소중하지만, 진심으로 별을 바라보거나 기타 소리에 미친 듯이 끌려들거나 하는 시기란 인생에서 극히 잠깐밖에 없으며, 그것은 아주 좋은 것이다. 방심해서 가스 끄는 것을 잊거나,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일도 가끔이야 있겠지만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밤의 거미 원숭이 夜のくもざる>


































한밤중의 기적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의 효용에 대하여

소녀가 소년한테 묻는다.
“너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밤중의 기적 소리만큼”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뭔가 관련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밤중에 문득 잠이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어. 아마 두시나 세 시, 그쯤일 거야. 하지만 몇 시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한밤중이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어. 한번 상상을 해봐. 주위는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도 전혀 안 들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ㅡ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장소로부터,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고, 격리되어 있다고 느껴. 이 넓은 세상에서 아무한테도 사랑받지 못하고,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돼. 설령 내가 이대로 사라진대도 아무도 모를 거야. 그건 마치 두꺼운 철상자에 갇힌 채,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 같은 느낌이야. 기업 때문에 심장이 아파서, 그대로 쩍 하고 두 조각으로 갈라져버릴 것 같은ㅡ그런 느낌이야. 이해할 수 있어?”
소녀는 끄덕인다. 아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말을 계속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가장 괴로운 일 중 하나일 거야. 정말이지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프고 괴로운 그런 느낌이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죽고 싶은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상자 안의 공기가 희박해져서 정말로 죽어버릴 거야. 이건 비유가 아니야. 사실이라고. 이것이 한밤중에 홀로 잠이 깬다는 것의 의미라고. 이것도 알 수 있겠어?”
소녀는 잠자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소년은 잠시 사이를 둔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에서 기적 소리가 들려. 아주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야. 도대체 어디에 철로가 있는지, 나도 모르겠어. 그만큼 멀리서 들려오거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야. 그렇지만 그것이 기차 기적 소리라는 것을 나는 알아. 틀림없어.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귀를 기울여.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기적 소리를 듣지. 그리고 나면 내 심장의 통증은 멈추고 시곗바늘도 움직이기 시작해. 철상자는 해면 위로 천천히 떠올라. 모두가 그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야. 들릴 듯 말 듯한 그 정도로 작은 기적 소리 덕분이라고. 나는 그 기적 소리만큼 너를 사랑해.”
거기서 소년의 짧은 이야기는 끝난다.
이번에는 소녀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아버지 죽이기 Tuer le pè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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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 때 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식욕 부진 상태에 가까웠죠.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산책을 하는데, 엄마가 풀밭에서 자라는 버섯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이건 소트라팽이란다.> 나는 먹을 수 있는 거냐고 엄마에게 물었죠. 그러자 엄마가 대답했어요. <아니야, 이건 독성이 있어.> 내가 곧장 그걸 먹어 보려고 하는 바람에 엄마는 하던 말을 끝맺지 못했어요. 그 후로 나는 그 버섯 생각만 했어요. 결국 그 독버섯들이 있던 곳에 몰래 가서 그것들을 먹어 치웠죠. 그러고 싶은 욕구가 맹렬하게 일었거든요. 그러고는 밤새도록 토했고, 결국 병원에 실려 갔죠.」
「자살하고 싶었던 거야?」
「그건 절대 아니에요. 엄마에게도 똑같이 말했죠. 당연한 일이지만 엄마는 내게 물었어요.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던 네가 독버섯은 왜 먹고 싶었니?>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답은 그러고 싶은 욕구가 맹렬하게 솟구쳤다는 것뿐이었어요.」
「그럼 지금은? 지금은 다르게 설명할 수 있어?」
「아뇨. 열다섯 살엔 사람이 미쳐 돌아간다는 대답 밖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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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결정에 돈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당시 나는 고작 열다섯이었고, 아무도 나를 아들로 삼아 주지 않았죠. 내가 엄청나게 원하는데도요.」
「그래서 그런 괴물 같은 남자를 아버지로 삼았니?」
「다시 말하는데, 그 사람이 날 선택했어요. 그걸로 충분했다고요.」
「나도 마찬가지다. 나도 널 선택했어.」
「별로 그렇다고 볼 순 없죠. 그리고 당신이 처음으로 날 선택한 것도 아니잖아요.」
노먼은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거냐? 그 사람이 맨 처음에 널 선택해서 더 좋았던 거야?」
「어쨌든 그 사람은 내게 접근하자마자 나를 매혹시켰어요. 아마도 그 사람이 처음이라 그랬을 거예요. 당신에 대해 말하자면, 당신을 존중하고 높이 평가하긴 했죠. 하지만 당신에게 매혹되진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훌륭한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는 거냐?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매혹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제 난 당신 입에서 나오는 늙은 보이 스카우트 같은 말에 전혀 설득되지 않아요. 나는 아버지의 매혹만큼 필수적인 매혹은 없다고 생각해요.」
......「바보같이 굴지 마. 그 사람은 널 이용해 수백만 달러를 얻어내려 했을 뿐이야. 그게 다라고!」
「난 그분이 그 돈을 갖게 돼서 행복해요. 사기도박은 나를 선택해준 데 대한 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요.」
노먼은 조를 바라보았다. 조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몇 년 전 크리스티나는 노먼에게 열다섯 살 때는 사람들이 미쳐 돌아간다고 했다. 조는 스물두 살인데도 아직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 남자가 그 위태로운 나이에 조를 매혹하고 조에게서 이성을 영원히 앗아가 버린 것이다.



 




167

「당신은 크리스티나와의 사이에 아이를 가질 수도 있었어요. 아마 지금도 그럴 수 있을 거고요.」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내게는 이미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내가 선택한 아이지요.」
「하지만 그 아이는 당신을 선택하지 않았잖아요.」
「나는 그 아이의 생각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나를 공정하게 평가해 주기를 말입니다.」
「그 아이가 공정함 같은 것엔 도통 관심이 없다는 걸 모르나요?」
「그 아이가 틀렸습니다. 사람은 공정해야 해요.」
「당신도 틀렸어요. 당신은 당신의 인생과 그 아이의 인생 모두를 망치고 있어요.」
「달리 어찌 행동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괴로움이 존재합니다. 바로 자기 아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버지의 괴로움이지요.」
그가 등을 돌렸다. 그는 더 이상 나와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 아들이 자기를 닮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꾸로 아버지가 아들을 닮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노먼이 미치광이가 된 것처럼.




아멜리 노통브





 

最高の離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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