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노센트 The Innocent>





























95

뒤편의 그 아파트들은 창문이 가운데뜰이나 비좁은 공간 너머의 옆 건물을 향해 나 있었다. 그런 까닭에, 레너드는 성가시게 깊이 따져보지 않았지만, 그때 어떻게 열린 욕실 문에서 늦은 오후의 겨울 햇살이 두 사람 사이의 마룻바닥으로 비쳐들 수 있었는지, 어떻게 허공에 떠돌던 먼지가 붉은 기 도는 황금색의 비스듬한 빛기둥 속에서 반짝였는지 하나같이 수수께끼였다. 





414

이제 철책에 이른 그는 그 사이로 울퉁불퉁한 황무지 너무 베를린장벽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는 푸른 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공동묘지의 나무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마치 아무 건물도 지어지지 않은 땅과 같은, 그의 시간과 그녀의 시간. 베를린장벽 이편으로는 벽 바로 아래를 따라 자전거 길이 뻗어 있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페달을 밟고 지나면서 서로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더웠다. 그는 이 후덥지근한 베를린의 더위를 잊고 있었다. 그가 옳았다. 분명 그녀의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 먼길을 올 필요가 없었다. 아달베르트 가가 아니라 여기, 이 폐허의 한복판으로. 서리surrey의 거실에서 포착할 수 없었던 의미가 여기서는 충분히 또렷해졌다. 





이언 매큐언





<청혼 : 너를 위해서라면 일요일엔 일을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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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친밀도를 더해가며
그의 하루는
모든 걸 제쳐두고 그녀를 떠올리며 눈의 초점을 잃은 채
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채워졌다.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밝음과 어둠의 모든 시간이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비생산성은
오로지 그에게만 가치가 있을 여러 경험들로 전이되었다.
그는 그 모든 것에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오드리 토투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세상을 완성시키는 것은 그녀의 실존이었고
종종 엉뚱함을 발산하는 그녀의 행동들은
세상과의 완벽한 조합을 이루며
다른 차원의 세상을 그에게 선사했다.




오영욱




<무의미의 축제 La Fete de L'insignifi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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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에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들이마셔 봐요,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그것은 지혜의 열쇠이고, 좋은 기분의 열쇠이며…….”




밀란 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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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 Saimdang's 510th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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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gul Proclamation Day 2014



Jimmy's Hall





<어떤 날>


































71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떠나지 않기도 좋은 계절이다. 나로부터 멀어지기에도 가까워지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나와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나와 너 사이의 거리는 얼마인가. 우리 사이의 계절이 가까웠으면 좋겠다. 다시 멀어질 수 있을 만큼.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 만큼. 다시 제대로 가까워질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다시 제대로 떠날 수 있을만큼.




이제니, 성미정, 김소연, 이병률, 요조 , 박세연 , 최상희 , 장연정, 위서현 




<개포동 김갑수씨의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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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줄 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사랑은 변한다. 하지만 관계가 변하는 건 늘 너 때문이다. 내가 라면이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라고 징징대기 전에 스스로 라면처럼 굴었떤 건 아니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면 갑수씨는 금세 또 자기 비하에 빠져들겠지. 자조는 피폐한자들의 가장 아늑하고 편리한 안식처다. 나는 그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지 않았다.









165


우리는 왜 믿지 않으면서 계속할 수밖에 없는 거죠?

연애를?

연애를.

천국에는 가야겠으니까요. 바보 같고 한없이 바보 같고 밑도 끝도 없이 바보 같은. 제정신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연애지만, 어찌됐든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유전자에 새겨진 관성 같은 거죠. 천국에는 가야겠으니까. 행복해지고 싶으니까.
행복한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행복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거만하거든요. 하지만

하지만

우리 모두 행복해지고 싶어하죠.

아니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행복하고 싶어하죠.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한번 두고 봅시다. 아주 어쩌면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우리가 아무리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사람을 만나보았자 인생에 대해 뭘 알 수 있겠습니까. 인생에서 정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들은 가끔 깨닫되 대개 까먹게 되지요.

가끔 깨닫되 대개 까먹게 되니까요.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허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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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 Tolstoy's 186th Birthday






톨스토이 탄생 186주년



<겨울 일기 Winter Journal>






























241
 
당신이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걸을 필요가 있다. 걷다보면 단어들이 떠오르고, 머릿속에서 그것들을 쓰면서 단어들의 리듬을 들을 수 있다. 한 발 앞으로,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면서 심장이 이중으로 두근두근 뛴다. 두 개의 눈, 두 개의 귀, 두 개의 팔, 두 개의 발. 이것 다음에 저것. 저것 다음에 또 이것. 글쓰기는 육체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몸의 음악이다. 단어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글쓰기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어들의 음악은 의미가 시작하는 곳이다. 당신은 단어들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지만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걷고 있다. 언제나 걷고 있다.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당신의 리듬, 심장의 박동이다. 만델스탐은 이렇게 말한다. 단테가 신곡을 쓰면서 닳아 없앤 신발이 몇 켤레일지 궁금하다.춤보다 작은 형태로서의 글쓰기.
 





246
꿈속에서 아버지에게 이야기한 일. 지금으로부터 여러 해 전 아버지가 의식의 건너편 어두운 방에서 당신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탁자에 앉아 침착하고 신중하게 당신과 긴 대화를 느긋하게 나누었다. 아버지는 줄곧 당신을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면서 당신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 주었지만 꿈에서 깨고 보니 당신이 한 말이건 아버지가 한 말이건 한 마디도 기억나지 않았다. 재채기하고 웃고, 하품하고 울고, 목청을 가다듬고, 입술을 깨물고, 아랫니 뒤를 혀로 쓸고, 몸을 떨고, 방귀를 뀌고, 딸꾹질을 하고, 이마에서 땀을 훔치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고이런 일들을 몇 번이나 했을까? 몇 번이나 발가락을 채이고 손가락을 찧고 머리를 부딪쳤을까?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디고 미끄러지고 넘어졌을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을까? 몇 발짝이나 걸었을까? 몇 시간이나 손에 펜을 쥐고 보냈을까? 몇 번이나 키스를 주고받았을까?
 
당신의 어린 자식들을 품에 안는 것.
 
당신의 아내를 품에 안는 것.
 
침대에서 나와 창가로 걸어가면서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당신의 맨발. 당신은 예순네 살이다. 바깥은 회색이다 못해 거의 흰색에 가깝고 해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당신은 자문한다. 몇 번의 아침이 남았을까?
 
문이 닫혔다.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당신은 인생의 겨울로 들어섰다.




폴 오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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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Liberation Day 2014



<살인자의 기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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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앞길은 벚꽃이 좋았다. 일제시대에 심은 그 벚나무 터널 아래로 봄이면 사람들이 장사진을 쳤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면 나는 일부러 그 길을 에돌아 다녔다. 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무서웠다. 사나운 개는 작대기로 쫓지만 꽃은 그럴 수가 없다. 꽃은 맹렬하고 적나라하다. 그 벚꽃길, 자꾸 생각난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저 꽃인 것을.




김영하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