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おおきなかぶ, むずかしいアボカド 村上ラヂオ 2>




























서른 살이 넘은 녀석들

내가 대학생 때 서른 넘은 놈들을 신용하지 마라라는 말을 흔히 들었다. Don’t trust over thirty, 어른을 믿지 마라, 하는 의미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자신도 머잖아 틀림없이 서른이 될 텐데 말이다. 하기야 내가 서른이 되었을 때는 농담 삼아 마흔이 넘은 인간을 신용하지 마라고 했지만, 그래서 마흔이 되면…… 끝이 없으니 관두자.
우리가 스무 살이던 시절에는 분명 자신이 서른을 넘으면 지금의 어른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른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세상은 확실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의식의 준이 높고 이상에 불타는 우리가 어른이 되니 세상은 나빠질 리 없겠지. 나쁜 것은 지금 저기 있는 어른이다. 머잖아 전쟁은 사라지고 빈부격차도 줄고 인종차별도 없어질 거야, 잔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존 레넌도 (아마)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체 게바라도 (아마)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토피아가 도래하지 않았다. 전쟁도 빈곤도 인종차별도 없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서른을 넘었고, 대부분 옛날의 그 지루하고 멍청한 어른이 되었다. ‘바보 같다고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보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바보 같다. 그러나 자신이 그 시절, 그 장소에 있을 때는 전혀 바보 같지 않았다. 그건 상당한 설렘이었다. 비틀스는 ‘All I Need Is Love’를 노래했고, 낭랑하게 트럼펫이 울렸다.
유감스럽게, 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런 낙관적인 시대는 그때 끝나버렸다. 요즘 앞으로 세상은 점점 좋아질 거야라고 믿는 젊은이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렵다.
내 경우에 서른 살이 넘어 달라진 거라면 소설가가 되어 생활을 일신한 것이었다.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렸다. 그때까지는 엄청난 골초에다 올빼미형이었으니 상당히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 후로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으로 나를 신용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요컨대 일찍이 제시한 명제 서른 넘은 놈들을 신용하지 마라를 어떤 의미에서 계속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어디를 신용하지 못하는가 하면……. ‘앞으로 세상은 확실히 좋아질 것이다라고 확신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이페이스로 건강 면에서나 사적인 면에서나 담담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이것이 내가 나 스스로를 별로 신용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얘기를 굳이 쓸 마음이 든 것은 요전에 존 레넌과 체 게바라에 관한 영화를 연달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아, 그렇지. 이런 시대가 실제로 있었지하며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사랑이 전부다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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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학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