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Demian>






























9

모든 사람의 삶은 제각기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길의 시도이며 좁은 오솔길을 가리켜 보여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건만, ㄴ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어떤 이는 둔하게, 어떤 이는 더 환하게, 누구나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누구나 제 탄생의 찌꺼기를, 저 근원세계의 점액질과 알껍질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결코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이나 개미로 남아 있다. 어떤 이들은 상체는 인간인데 하체는 물고기다. 하지만 누구나 인간이 되라고 던진 자연의 내던짐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기원, 그 어머니들은 동일하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하지만 깊은 심연에서 밖으로 내던져진 하나의 시도인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누구나 오직 자기 자신만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81

각성이 일어나면서 익숙한 감정들과 기쁨들이 변질되고 빛이 바랬다. 정원엔 향기가 사라지고, 숲은 유혹하지 않고, 내 주변의 세계는 낡은 상품의 떨이판매같이 김빠지고 자극이 없고, 책들은 종이, 음악은 소음이 되어버렸다. 가을 나무 주변으로 그렇게 잎사귀가 떨어진다.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비가 나무에 내리고, 햇빛이나 서리도 내리지만, 나무는 천천히 가장 내밀하고 가장 깊은 속으로 점점 더 움츠러든다. 나무는 죽지는 않는다. 기다린다. 








85

11월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날씨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짧은 산책을 하곤 했다. 그런 산책에서 일종의 환희를 느꼈다. 우수, 세계경멸, 자기경멸로 가득 찬 환희였다. 어느 날 저녁 안개가 축축하게 낀 어스름녘에 그렇게 도시 주변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공원의 텅 빈 너른 가로수 길이 나더러 오라고 부르는 듯했다. 길에는 낙엽이 두툼하게 쌓여 있었다. 나는 울적한 쾌감에 젖어 낙엽을 발로 헤집었다. 축축하고 쓰디쓴 냄새가 났다. 멀리 있는 나무들은 유령처럼 커다란 모습으로 안개 속에 어슴푸레 서 있었다. 
가로수 길 끝에서 우물쭈물 멈춰 서서, 나는 검은 나뭇잎을 들여다보며 풍화와 사멸의 축축한 향기를 탐욕스레 들이마셨다. 내 안의 무언가가 그 향기에 화답하고 그것을 환영했다. 아, 삶은 얼마나 김빠진 맛인가!








104

데미안은 살짝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잘 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친애하는 싱클레어.”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네게 불쾌한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어. 게다가 네가 지금 어떤 목적으로 그 잔을 들이켜는지 우리 둘 다 모르지. 네 안에서 내 삶을 만드는 것은 그걸 이미 알고 있겠지. 그걸 아는 건 좋은 일이야. 우리 안에 누군가가 있어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원하고, 모든 것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한다는 사실 말이야. 그런데 용서해라, 난 그만 집에 가야겠어.”




헤르만 헤세





The Big Wedding





言の葉の庭




Google 20130625




Antoni Gaudí's 161st Birthday




<뭐냐>





























대화


바람이 사람일 때가 있다
그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깜깜할 때

거기에 바람이 분다




고은





The Fosters




<이인 L'Etranger>






























65

태양은 여전히 붉게 파열하고 있었다. 모래 위에선 바다가 작은 파도로 부서지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난 바위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고, 태양 아래에서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걸 느꼈다. 태양의 열기가 온통 나를 짓누르며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걸 막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의 거대한 숨결이 얼굴에서 느껴질 때마다, 난 바지 주머니 속의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태양을 이기고자, 그리고 태양이 내게 쏟아붓는 아른한 취기를 물리치고자,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모래나 유리 조각이나 새하얘진 조개껍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칼날이 나를 찔러댈 때마다, 난 이를 악물었다. 난 오랫동안 걸었다. 








104

증인신문이 끝났다. 법정을 나와 호송차에 오르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여름날 저녁의 냄새와 색깔을 감지했다. 구르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 극도의 피곤에 빠졌을 때처럼, 내가 좋아했던 도시의 친숙한 소리들과 만족감을 느낄 때도 있었던 시간대의 친숙한 소리들이 하나하나 모조리 내개 다가왔다. 공기가 이미 한풀 꺾인 가운데 신문팔이가 외치는 소리, 자그마한 공원에서 새들이 마지막으로 푸드덕거리는 소리, 샌드위치 장수들의 고함소리, 도시의 언덕 길모퉁이를 지나가는 전차의 탄식 소리, 그리고 항구에 밤이 내리기 전 공중에 떠도는 소리, 이 모든 게 내가 감옥에 들어오기 전에 익히 알고 있던, 눈 감고도 걸어가던 거리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그렇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만족해하던 시간대였다. 그 당시 나를 기다리던 것은 늘 가벼운 잠, 꿈도 꾸지 않는 잠이었다. 그런데 뭔가 달라져 있었다. 왜냐하면 다음날을 기다리며 내가 되찾은 곳은 바로 내 독방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여름 하늘에 새겨진 친숙한 길들이 감옥에 닿을 수도 있고, 무고한 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듯이 말이다.







130

신부가 떠나자, 난 평온을 되찾았다. 기진맥진한 나머지, 난 침대에 쓰러졌다.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 얼굴에 별빛이 쏟아져 내려와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들판에서 나는 소리들이 내게로 올라왔다. 밤 냄새, 흙 냄새 그리고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식혀주고 있었다. 이 잠든 여름의 경이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안으로 밀려들고 있었다. 그 순간, 밤이 시작되려는 바로 그때, 고동소리들이 울려퍼졌다. 고동소리는 이제 나와는 영원히 무관해져버린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엄마 생각이 났다. 말년에 엄마가 왜 “약혼자”를 얻게 되었는지, 엄마가 왜 다시 시작하려는 모험을 했는지,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그곳, 그곳에서도 역시, 생명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주위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잠시 머물다 가는 때인 것 같았다. 죽음에 임박해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을 터였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엄마에 대해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그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몰아내고 희망을 비워주기라도 한 듯이, 별들이 가득하고 징조들로 가득 찬 이 밤과 마주하자, 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비슷하고,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이 느껴지자, 난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는, 내게 남은 소원이 있었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알베르 카뮈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おおきなかぶ, むずかしいアボカド 村上ラヂオ 2>




























서른 살이 넘은 녀석들

내가 대학생 때 서른 넘은 놈들을 신용하지 마라라는 말을 흔히 들었다. Don’t trust over thirty, 어른을 믿지 마라, 하는 의미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저주하는 말을 진지하게 할 수 있는 걸까? 자신도 머잖아 틀림없이 서른이 될 텐데 말이다. 하기야 내가 서른이 되었을 때는 농담 삼아 마흔이 넘은 인간을 신용하지 마라고 했지만, 그래서 마흔이 되면…… 끝이 없으니 관두자.
우리가 스무 살이던 시절에는 분명 자신이 서른을 넘으면 지금의 어른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른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세상은 확실히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의식의 준이 높고 이상에 불타는 우리가 어른이 되니 세상은 나빠질 리 없겠지. 나쁜 것은 지금 저기 있는 어른이다. 머잖아 전쟁은 사라지고 빈부격차도 줄고 인종차별도 없어질 거야, 잔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존 레넌도 (아마)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체 게바라도 (아마)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토피아가 도래하지 않았다. 전쟁도 빈곤도 인종차별도 없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서른을 넘었고, 대부분 옛날의 그 지루하고 멍청한 어른이 되었다. ‘바보 같다고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보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바보 같다. 그러나 자신이 그 시절, 그 장소에 있을 때는 전혀 바보 같지 않았다. 그건 상당한 설렘이었다. 비틀스는 ‘All I Need Is Love’를 노래했고, 낭랑하게 트럼펫이 울렸다.
유감스럽게, 라고 해야 할 테지만 그런 낙관적인 시대는 그때 끝나버렸다. 요즘 앞으로 세상은 점점 좋아질 거야라고 믿는 젊은이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기 어렵다.
내 경우에 서른 살이 넘어 달라진 거라면 소설가가 되어 생활을 일신한 것이었다.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달렸다. 그때까지는 엄청난 골초에다 올빼미형이었으니 상당히 획기적인 변화였다. 그 후로 현재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으로 나를 신용할 수 없다고도 생각한다. 요컨대 일찍이 제시한 명제 서른 넘은 놈들을 신용하지 마라를 어떤 의미에서 계속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어디를 신용하지 못하는가 하면……. ‘앞으로 세상은 확실히 좋아질 것이다라고 확신하던 모습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지금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이페이스로 건강 면에서나 사적인 면에서나 담담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으니…… 이것이 내가 나 스스로를 별로 신용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얘기를 굳이 쓸 마음이 든 것은 요전에 존 레넌과 체 게바라에 관한 영화를 연달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아, 그렇지. 이런 시대가 실제로 있었지하며 나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사랑이 전부다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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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도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학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The Chef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