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村上朝日堂の逆襲>

























































비평을 향유하는 방법

......내게도 물론 글을 쓰는데 몇 가지 개인적인 신조가 있다......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그것은 ‘작가는 비평을 비평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개별적인 비평에 대해서든 비평가에 대해서든 비평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을 해봐야 무의미하고, 무익한 트러블을 불러오며, 자기만 치사한 사람이 될 뿐이다.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고, 덕분에 스스로를 갉아먹을 기회를 몇 번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내적 지옥이 존재함을 시사했는데, 작가가 비평이나 비평가를 비평하는 상황도 그 지옥 중 하나라고 나는 확신 한다.
작가는 소설을 쓴다ㅡ이것이 일이다. 비평가는 그에 대해 비평을 쓴다ㅡ이것도 일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난다. 각기 다른 입장에 있는 인간이 각자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식사를 하고(혹은 혼자서 식사를 하고), 그러고는 잔다. 그게 세계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세계의 구조를 신뢰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전제조건으로 수용하고는 있으며, 트집을 잡아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트집을 잡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식사를 하고, 한시라도 빨리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들려고 노력한다. 내가 스칼렛 오하라는 아니지만, 밤이 밝으면 내일이 시작되고, 내일은 내일의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한 비평을 거의 읽지 않는 인간이지만 간혹 기분이 내켜 읽었다가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할 때가 더러 있다. 사실을 오해한 경우도 있고, 명명백백하게 빗나간 추측도 있고, 노골적인 인신공격도 있고,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 썼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비평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정을 고려한다 해도, 작가가 비평을 비평하거나 그에 대해 어떤 형식으로든 변명하는 것은 당치않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쁜 비평이란 말똥이 듬뿍 들어찬 거대한 오두막과 흡사하다. 만약 우리가 길을 걷다가 그런 오두막과 맞닥뜨린다면 서둘러 지나쳐버리는 게 상책이다. ‘왜 이렇게 냄새가 나지’라는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 말똥이란 원래 냄새가 나는 것이고, 오두막의 문을 열었다가는 더욱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스파게티 소설이란 내가 만든 말로, 스파게티를 삶으면서 읽기에 적합한 소설이라는 뜻이다. 물론 폄하하는 뜻은 아니고, 스파게티를 삶는 와중에도 무심결에 집어들게 되는 소설 정도로 받아들여주면 좋겠다.


























미즈마루 무라카미 씨의 얼굴은 약간 언짢아하는 분위기로 그리면 훨씬 좋거든요. 틀이 딱 잡힌단 말씀이에요.
하루키 입을 꽉 다문 듯한.....
미즈마루 그래요, 그래요. 입을 꽉 다문 얼굴. 어금니를 곽 깨문 거예요.
미도리 과연
하루키 하하하하하......
미즈마루 필시 무슨 하찮은 일로 짜증을 내고 있겠지 싶은, 뭐랄가, 제멋대로 토라져 있는 듯한...... 그렇게 약간 기분 나빠하는 얼굴을, 눈썹을 약간 구부려서 그리면 굉장히 닮았단 말씀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Mr Selfridge





The Impossible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村上朝日堂>





































로멜 장군과 식당칸

옛날에 무슨 책을 읽다가 로멜 장군이 열차 식당칸에서 비프커틀릿을 먹는 장면과 맞닥뜨린 적이 있다.
장면이라지만 특별히 상세한 정경묘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이를테면 ‘파리행 열차 식당칸 안에서 로멜 장군은 점심으로 비프커틀릿을 먹었다'는 정도의 문장이 실려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딱히 비프커틀릿에 얽힌 얘기도 아니다. 요컨대 로멜 장군이 비프커틀릿을 먹었다는 단순한 언급일 따름이다.
내가 어째서 이 별것 아닌 문장을 잘 기억하고 있는가 하면, 색깔의 조화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선 로멜 장군의 빳빳한 남색 서지 군복, 흰색 테이블클로스, 막 튀겨낸 옅은 갈색의 비프커틀릿, 버터에 가볍게 볶은 누들,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지는 북프랑스의 푸른 전원 풍경ㅡ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문장을 읽어나가며 언뜻언뜻 떠오른 것이 그런 색깔들의 어울림이었다. 그렇기에 이렇다 할 의미도 없는 그 문장이 언제까지고 머리 한구석에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문장의 미덕이라 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를테면 꼬리에 꼬리를 물로 퍼져나가는 문장 말입니다.
가령 소설 같은 걸 쓸 때는, 이렇게 열린 문장으로 시작하면 이야기가 점점 확대되어 간다. 반대로 아무리 공을 들인 아름다운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게 닫힌 문장이면 얘기는 거기서 그만 멈추고 만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런 글을 읽고 있노라면 참을 수 없이 비프커틀릿이 먹고 싶어진다. 나는 비프커틀릿의 우수한 맛에 대해 여기저기에다 글을 썼는데 좀처럼 그 훌륭함이 인정되지 않아(특히 간토 지방은 지독하다) 정말 유감스럽다.
아직까지도 “네? 쇠고기로 커틀릿을 만든단 말입니까? 어째 영 맛이 없을 것 같은데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식당칸 메뉴에도 대개 비프커틀릿은 없다. 원통하다.
































더티 해리 문제

지난번에 영화의 자막은 글자 수가 한정되어 있어 만들기 힘들다는 얘기를 썼다. 특히 <스타워즈>의 C3PO처럼 무턱대로 뭐라고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캐릭터가 나오면 완전히 녹아웃이다.
재미있는 표현의 사투리 같은 것도 전달하기 어렵다. 동음이의어나 말장난 유도 그 묘미를 살릴 길이 없다. 자막을 제작하는 일이란 실로 고달프다. “이거야 원, 번역이라기보다 하이쿠나 카피라이팅의 세계에 더 가깝죠”라고 모 관계자는 말한다.
<더티 해리 4>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인질에게 총을 들이대는 강도를 향해, 개의치 않고 매그넘 총구를 노려보며 “Go ahead, Make my day"라고 위협하는 장면이 있다. 자막은 “자, 쏴봐”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의미상으로만 보면 틀린 게 없지만 너무 군더더기 없이 매끈해 어쩐지 감동이 덜하다. 이 대사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이니까, 좀 더 비틀어보는 게 좋을 뻔했다.
그러니 이 ‘Make my day'란 말은 참 번역하기 껄끄럽다. 느낌상으로는 “자, 쏘라고. 나도 한 방 당겨보게” 정도인데, 모처럼의 기회니까 좀 더 멋진 대사를 지어내고 싶다. “어디 쏴봐, 나도 원하는 바야.” 이쯤이면 더티 해리 갤러핸 형사의 성격에 좀 더 가까워진다. 더 멋진 번역문이 완성되거든 가르쳐주세요. 조건은 열일곱 자 이내로 마무리할 것. 제법 어렵죠. 과연 이쯤 되면 하이쿠나 카피라이팅 세계에 가까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호놀룰루에서 이 영화를 봤는데, 이런 멋들어진 대사가 나오면 젊은 청년들이 모두 “야호!” 하고 환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이런 분위기는 영락없이 내 학생 시절의 도에이 야쿠자 영화와 비슷하다. “세상은 널 용서할지라도 내 등에 새겨진 사자는 널 용서 못 하지.” 확실이 이런 결정적인 대사를 번역하는 일이란 쉽이 않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Life of Pi





The Carrie Diaries





Girls Season 2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村上朝日堂はいほー!>
























































ON BEING FAMOUS
-유명하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이 한번 유명해지면 전혀 파악이 불가능한 세계로부터 파악이 불가능한 유의 호의와 악의를 동시에 받게 된다. 어떤 때에는 무의미하게 매도당하고 치켜세워진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한 번도 얽힌 적이 없는, 이름도 모르는 상대로부터. 그런 인생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유명인에 적합하다. 달갑지 않은 사람은……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에 대처하고 있다. 나는 원칙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개인을 완전히 분리해서 매사를 생각하려 한다. 즉 내게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하나의 가설이다. 가설은 내안에 있지만 나 자신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다지 상처를 받지 않고, 머리가 이상해질 일도 없다. 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파악이 가능한 조그만 원 안에서 생활하고,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파악이 불가능한 커다란 원 안에서 살아간다. 내가 책상 앞에 앉을 때 그들은 하나가 되고, 책상 앞을 떠날 때 그 둘은 각자가 속한 세계로 돌아간다. 각자의 소박한 자아를 지니고서.
그런데 이렇게 리얼하고 쿨하게 생각해도, 역시 명성은 나를 때로 아주 불가사의하고 서글픈 장소로 데려간다. 그곳은 폐쇄된 유원지 같은 장소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고 너덜너덜한 포스터가 바람에 퍼덕거린다. 페인트칠이 벗겨져나갔고, 펜스는 녹슬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생각한다. 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런데도 나는 거기에 있다. 입구도 출구도 어딘지 모를, 닫혀있는 쇠락한 유원지에.
.......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그 폐쇄된 유원지에 있다. 그곳의 풍경은 아주 불가사의하다. 어쩌다 이런 곳에 오고 말았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튼 오고 말았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나는 주위를 돌아본다.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다만 바람이 휭휭 소리 내며 불고, 기묘한 모양의 그림자가 땅 위에 길게 늘여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생각한다. 아우라를 지녔던 그 아이들도 아마 나름 힘들었을 거라고.







사랑에 빠지지 않아서

외모는 딱 내 취향인데 인격은 그렇지 못한 여자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참 서글퍼진다. 보고만 있어도 서글프니 깊이 엮이면 훨씬 더 서글플 것이다. 그런 여자를 볼 때의 심경은ㅡ상당히 비근한 예로ㅡ옷가게에서 아주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는데 사이즈가 전혀 맞지 않을 때의 심경과 비슷하다. 머리로는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마음은 깨끗하게 포기하지를 못한다.
나는 칠팔 년 전에 그런 여자와 사오 일을 같이 여행한 적이 있다. 물론 단둘이 여행했던 건 아니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인상이 참 좋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얘기를 나누다보니 나와 성격이 조금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격이 맞지 않으니 친해질 리도 없고,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헤어져 그후로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중에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마주해야 했기에 그 사오 일 동안 나는 상대를 비교적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리고 그 때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ㅡ절실하게 깨달을 것까지도 없는 일지만ㅡ내가 내 눈으로 파악한 세계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는 그 성립과정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었다. 즉 내가 아무리 그녀의 외모와 인격이 상반된다고 느낀들, 그 상반된 상태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는 이상, 내게는 가타부타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게다가 그녀의 눈으로 본 세계에서는 내가 상당히 빼뚤어진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거듭 말하건대, 이런 인식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면 도저히 사랑을 할 수 없다. 영화 <청춘낙서>에 리처드 드레이퍼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선더버드를 탄 '꿈의 여자 the girl of a dream'를 잊지 못해 밤새 그녀 모습을 찾아 헤매는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사랑이란 그렇게 기존의 시스템을 넘어선 행위인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해 뜨는 나라의 공장 日出る国の工場>



























162

'그건 원래 그런 것이다'가 나의 기본 방침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크리에이터, 매뉴팩처러)이 존재하고, 그것을 원하는 소비자층이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며, 나는 원칙적으로 모든 현상은 선善이라고 믿는다. 선이라는 표현이 지나치게 강렬하다면 거기다 '내추럴'이란 색채를 조금 더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현상을 긍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긍정 혹은 부정을 초월해, 모든 현상을 나 자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