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여행가방에 무엇이 있나


나에게 여행가방에다 뭘 넣고 다니느냐 물으면 나는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대신 몽콕 야시장 노점식당에서 만난 영국인 앤드류의 여행가방이 그 누구의 여행가방보다 아름다웠다고만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짐만 가지고 떠남은 떠남이 아니다. 최소한의 감정의 재료를 함께 가져간다면 그 어느 곳에도 새로운 인생의 조각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앤드류는 어느 날, 아버지의 사진첩을 보다가,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실의에 빠진 끝에 정신적인 공황을 어찌해보려고 아버지 혼자 먼 여행을 떠났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땐 어려서 잘 몰랐었지만 , 그때 아버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힘들었구나하는 늦어버린 시간의 느낌을 만지게 된다. 그 목적지가 홍콩이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떠났던 홍콩은 어떤 나라일까 앤드류는 상상했다.
일단 앤드류는 여행가방에다 아버지가 홍콩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홀로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들을 챙겨 담았다. 그리고 그걸 들고 홍콩에 와서는 사진의 배경이 된 곳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버지와 똑같은 포즈로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는다. 아버지처럼 똑같이, 혼자 삼각대를 놓고 말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나란히 놓이게 될 침사추이 거리 앞에 서 있는 아버지 사진과 앤드류 사진은. 애버딘 항구에 서 있는, 그리고 피크 트램 앞에 서 있는 아버지 사진과 그의 사진은.
비록 따로따로이지만 이글이글 가슴 달아오르는 여행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에게, 그리고 세상이 없는 어머니에게 가슴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방식의 어떤 의식 같았다. 멋지고도 성스러운 의식. 앤드류는 그냥 홍콩을 여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일부분과 손을 맞잡은 것이다. 휑한 빈자리에 사랑한 존재를 이식해 넣은 것이다.

 
내가 허기질 때 배고프겠다라는 누군가의 말보다, 식당에 같이 앉아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허겁지겁 먹고 있는 나에게 배고팠지?’라고 건네는 말의 온도가 몇 배 더 뜨겁다고 믿는다. 그 말은 거의 가족에 가까운 사람들끼리나 할 수 있는 말이어서 그런 것 같다. 배고프다, 라는 말은 왠지 그냥 그렇게 아는 사이에선 편히 쓰지 않는 말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촉촉해진 눈으로 이야기를 마치면서 허겁지겁 볶음국수를 먹고 있는 앤드류에게 하마터면 배고팠지?”라는 말이, 그것도 한국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그는 배고팠을 것이 분명하고, 그가 영국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충분히 몇 번이고 들을 수 있는 말일 것이므로 나는 하지 않기로 했다.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