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13

나는 너를 반만 신뢰하겠다.
네가 더 좋아지기를 바르는 마음에서다.

나는 너를 절반만 떼어내겠다.
네가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21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







25

심정의 기복을 담은 색. 그래서 먹고 싶거나 몸에 걸치고 싶은 색. 마음에 닿으면 길길이 일어날 것만 색. 칙칙한 바닥에서 일어나라고 부추기는 색.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 없이 느껴지는 날, 가까이 두어야 할 분홍은 그런 색이다.







26

육 개월 동안 계속되는 빤간 날들을 만들겠다고 너는 말한다. 일을 그만두고 낯선 곳으로 날아가 자동차 하나를 사겠다고 한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저쪽 끝에서 다시 정반대 쪽을 향해 차를 몰다보면 너의 서른 살이 조금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찾는 동안, 네가 그 틈에 끼어 네 감정을 케이크 조각만큼 나줘 주는 동안, 그 피곤 때문에라도 네 자신이 실망스러웠노라고 한다. 그렇게 말하는 넌 어떤 달리기에서 진 사람 같았다.
그러나 괜찮다. 너는 무려 육 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는 빨간 날들을 만들기로 했으니까. 너는 잠시 동안의 최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 조금 울고 조금 웃다가 오래달리기를 마친 얼굴을 하고 그리운 것들을 찾아 되돌아올 테니까.
세상의 모든 등대를 돌아보고 왔다고 한들, 서커스단에 섞여 유랑하느라 몸이 많이 축났다고 한들 뜨겁게 그리운 것들이 성큼 너를 안아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들 것은 너를 질투할 것이 분명하니까.
누군가가 네가 없는 너의 빈집에 들러 너의 모든 짐짝들을 다 들어냈다고 해도 너는 네가 가져온 새로운 것들을 채우면 될 터이니 큰일이 아닐 것이다. 흙도 비가 내린 후에 더 굳어져 인자한 땅이 되듯 너의 빈집도 네가 없는 사이 더 견고해져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간 네가 서로 껴안는 것, 그게 여행이니까. 
그렇게 네가 돌아온 후에 우리 만나자. 슬리퍼를 끌고 집 바깥으로 나와 본 어느 휴일, 동네 어느 구멍가게 파라솔 밑이나 골목 귀퉁이쯤에서 마주쳐 그동안 어땠었노라고 얘기하자.







30

아무도 나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없다면 그것은 이미 실패한 삶. 세상이 나를 등졌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망친 삶.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의 길고 긴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뭔가를 저지르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향해 돌아설 것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구가 되고 싶다고 말을 걸어올 것이다.







36

살면서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좋을 한 사람쯤 있어야 한다. 그 한 사람을 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은 살면서 만나지기도 한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된다.
삶은 일방통행이어선 안 된다. 루벤 곤잘레스처럼 우리는 세상을 떠날 때만 일방통행이어야 한다. 살아온 분량이 어느 정도 차오르면 그걸 탈탈 털어서 누군가에게 보여야 한다. 듣건 듣지 못하건 무슨 말인지 알아듣건 알아듣지 못하건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다 털어놓을 한 사람.







37

네가 떠난 창가 자리에, 누군가 젓가락 커버를 접어 학 한 마리를 올려놓았다. 그것은 듬직하게 너의 빈자리를 지켰다. 산 너머의 바다가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것 같았는데 실은 창밖에 흰 눈이 내리는 거였다. 눈은 내렸지만 내 가슴은 가시가 박혔는데도 터지지 않았다. 혹시 심장을 꺼내 볼 수 있다면 우리들 심장은 보라색이 아닐까? 우리들 가슴 안쪽에 든 멍이 모두 심장으로 몰려가서 보라가 되었다면.
사랑에 미쳐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히 보라색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만약 누구든 그 찬란했던 기억을 보관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고체이든 액체이든 혹은 기체일지라도 그것은 보랏빛일 거란 생각을 한다.







38

어쩌면 우리 이냉의 내비게이션은 한 사람의 등짝인지도 모릅니다.
좋은 친구, 아름다운 사람, 닮고 싶은 어떤 사람.
그리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등.

그걸 바라보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향입니다.





이병률





Mem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