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The Book of Illu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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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왼쪽을 봐요. 앨머의 그 말에 나는 그녀가 내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책 제목들을 훑으면서 눈을 왼쪽으로 옮기다가 초록색과 황금색으로 된 두 권짜리 책을 찾아냈다. 플레야드 출판사에서 나온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편의 회상>이었다.
그것은 나와 별 상관이 없어야 했음에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샤토브리앙이 이름 없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나는 헥터가 그 책을 읽었고 내가 지난 18개월 동안 헤매고 있었던 바로 그 기억의 미궁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데서 감동을 받았다. 어쨌건 간에 그것은 또 하나의 접촉점, 맨 처음부터 나를 그에게로 끌어당긴 우연한 만남과 기묘한 공감으로 맺어진 또 하나의 연결 고리였다. 나는 첫번째 권을 책꽂이에서 빼내어 펼쳐 보았다. 엘머와 함게 가려던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책장들은 내 손으로 몇 페이지라도 쓸어 보고 싶다는, 헥터가 그 방의 정적 속에서 읽었을 글자들을 몇 자라도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를 수 없어서였다. 펼쳐진 페이지는 중간쯤 되는 곳이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연필로 희미하게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하나 보았다. 위기의 순간들이 사람들에게서 배가된 생명력을 창출해 낸다. 또는 좀더 간명하게 번역하자면. 사람들은 곤경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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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3월 31일. 오늘 밤에는 프리다의 개를 산책시켰다. 다다이즘 화가의 이름을 따서 아르프라고 불리는 털이 곱슬곱슬한 검은 놈이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비도 내리고 있었겠지만 빗발이 너무 가늘어서 증기처럼 느껴졌다. 더 이상 땅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름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가로등 가까이로 다가갔고 그러자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어둠 속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무수한 점들의 세상, 빛을 굴절시키는 수백 수천만 개의 점들로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참으로 이상하면서도 참으로 아름다웠다. 밝게 비추어진 안개 방울들이.




폴 오스터






Memories